한줄 詩

네가 꼭 채운 나의 배는 - 이선영

마루안 2016. 2. 18. 00:52



네가 꼭 채운 나의 배는 - 이선영



아홉 달째 내 배는 계속 불러오고 있다
배는 단단하게 부풀어오른 반쪽의 공이 되어서
공기와 바람의 벽을 밀고 다니고 공간의 아가미를 둔하게 하고 있다
이 배는 빛도 없는 컴컴한 한가운데 새로운 무엇을 키우고 있다, 그것도 아주 무거운 것을
어둠속에 던져진 우연의, 또는 음험한 필연의 씨앗 하나! 무거움을 꽃피우는
배가 무거워 내 몸 전체가 허덕인다
이 배는 내 몸의 무게만이 아니다
내가 이 배를 내밀고 다닐 때
나는 내 생의 무게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세상이 다 보란 듯 버젓이
나는 뒤뚱뒤뚱,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고스란히 치러야 할 대가인 양 고분고분
주홍글씨 A 대신 금기의 배를 내밀고
그러나 사실 나는 속으로 쉼없이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무거움에서 놓여나는 길은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무거움을 끝까지 따라가서
기어코 나오려 하는 이 뱃속의 것을 꺼내놓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거움의 막다른 배를 열면 무거움은 수천 송이 꽃들로 갈라져 새로 태어나는가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 창작과비평








산고, 탈고, 배설고 - 이선영



낳는 힘 못지않다
버리거나
비우는 데 드는
안에 가득 찬 것을 밖으로 드러내거나
쏟아내는 데 드는 힘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문다
꼭꼭 씹어 삼켜도 신음소리가 새나온다
배가 아프다
엉덩이가 배기고 다리가 저리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고비를 넘기면 다른 한고비다
그냥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끝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참아야지,
끝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이제 곧 끝날 것이다
이 수고(受苦)로움
이 고(苦)로움
다 넘기면
고단함에 한풀 꺾어진 내 몸엔
280일간의 회임(懷姙). 그 장고(長苦)가 남긴 죽은 자줏빛 줄무늬만 또 한줄
아아, 길고 깊게 그어져 있을 것이다


큰 기쁨은 그 줄무늬를 긋고서야 찾아온다





# 아기 낳는 산모의 원초적인 심리를 이처럼 예리하게 끄집어낸 시가 있을까. 여자가 위대한 것은 아기를 낳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그 모성으로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젖꼭지를 달고 여자를 말하고 있다. 전부 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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