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배롱나무께 조아려 - 김병심

마루안 2016. 2. 9. 01:10



배롱나무께 조아려 - 김병심



엄마가 되기 싫을 때마다
산담에 걸터앉아 배롱나무 망연히 바라본다
아이만 낳으면 어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고
서른 지나 마흔까지만 참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고


울고 싶을 때마다 배롱나무 가지 어루만져본다
얄망궂은 아이들, 내 잘못과 버릇과 게으름 빼다 닮아
그대로 가슴에 옹이로 박히는 피의 내력
옹이 여섯 비단 꽃잎이 되어야 비로소 어머니가 되는 거라고
속살대는 백일 꽃의 경(經)귀에 머리 조아린다


뼈와 살 수피도 없이 앙상하게 말라
삼 년 내내 하얀 꽃 눈물처럼 떨구던 배롱나무
아버지가 되기 싫을 때마다 회초리 자국,
하얀 종아리 가지마다 야윈 문장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지
나 태우고 허랑하게 흘러다니던 오토바이 뒷좌석
꼭 붙잡으라던
반질반질한 손잡이 같았던
그때도 저렇게 휘었었지, 아버지 등이



*시집, <신, 탐라순력도>, 도서출판 각








이모의 귀는 천 개 - 김병심



팔자 그르친다는 무속의 구월
눈빛 먼 데 두고 부지런 떠는 억새 끝이 붉어진다


죽음 너머의 소리를 듣는 일도 나름 임명장 받은 소임이니 사후의 사람들과도 소통하려면 심지가 굳어야 하는 법, 세 번 팔자 그르쳐 얻은 자리라 이모의 귀도 유순해졌다 바쁠 것 없이 한 세상 휘휘 돌다 발에 차이는 봉분 앞에서 음귀의 분을 삭여 타이르는 일도 원해서 된 것도 아닐 테니 


한 생을 접은 꿈은 꾸어도 부질없으니
죽은 자는 애써 정을 붙잡을 일도 없다


죽은 이도 사랑을 찾고 밥을 먹으러 온다고 믿는 이모
그것들의 얘기도 들어줘야 사람 숨에 기대지 않고
제 세상 가꾸며 이생을 키워준다 하시니


억새 여린 손톱에 계절이 쇠약해지는 틈
두 다리 쭉 뻗은 숨은 꽃들이
밖으로 나와 제 이름값 한번 하고 간다


이모와 나도
주역을 듣는 귀 잠시 닫고
사람살이의 구경에 춤추고 노래하다
아주 잠깐, 잠깐이라도
숨어 지내는 생것의 사연 들을 수 있다면





# 읽을수록 긴 여운과 함께 가슴 저리는 시다. 이렇게 쉽게 읽히면서 감동이 전해 오는 시가 좋다. 제주라는 한정된 공간을 우주처럼 삼고 서정성 짙은 시를 써내는 시인이 대단하다. 제주에서 육지는 목이 길어야 보이는가. 털실로 옷을 짜듯 한 땀씩 엮어낸 싯구가 보석처럼 빛난다. 일면식도 없는 시인에게 너무 지나친 찬사인가. 좋은 시 읽은 보답이 이것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