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를 위한 기도 - 김종철
-못의 사회학 4
초식동물은
뜯는 풀이 달라 서로 다투지 않는다
도시를 떠도는 노숙자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다 좋아한다
얼룩말이 억세고 질긴 풀만 찾듯이
버려진 라면 박스에 엎드린 서울의 하루
높은 빌딩 창들이 뾰족뾰족 눈 뜬 밤
서로 어깨 맞댄 책상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모니터
열심히 살았지만 뭘 했는지 모르는
익명의 집짐승들 꿈꾸는 귀가 시간
노숙자들은 하루를 손절매한 증권회사나
지폐 한 장 접은 은행 점포 앞을 자리다툼한다
고깃집이나 음식 전문점에 손쉽게 자리 잡은 초보자들
바퀴벌레나 쥐를 피하지 못해
이 밤, 버러지보다 못한 변신을 꿈꾸리라
잠도 바로 눕거나 엎드리지 않고
반드시 모로 누워야 하는 까닭을
칼날처럼 떨어지는 세상의 하종가에
손 벌려본 자는 모두 알리라
신발만은 닦지 말라
모금함에 손 넣지 말라
어떤 가르침에도 마음껏 가래침 뱉고
초식동물처럼 울거나 풀만은 뜯지 말라
희망이란 이뤄지지 않지만 절대 버리지 않는 것
오 주여!
해고 노동자처럼
살기 위해 생의 철탑에 오른 저들에게
왜 죽어서 내려오라는 쪽지는
아무도 전달하지 않는지요?
*시집, 못의 사회학, 문학수첩
우리들의 묘비명 - 김종철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
부음 듣는 것, 덤덤한 일이다
마지막이라는 말
불시에 듣는 것, 정말 덤덤한 일이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사는 자의 몫
어제 죽은 신문의 부음란과 함께
하늘보다 더 높은 창
하나 내고 싶은 까닭이 여기 있었구나
살아서는 세워두고
죽어서는 눕혀놓은
우리들의 작은 깃발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
# 김종철 시인은 못에 대한 시를 참 많이도 썼다. 이 시집 제목도 못의 사회학이다. 이쯤되면 못의 대가라 해도 되겠다. 좋은 시로 내 가슴에 못질한 시가 여러 편이다. 시인도 세상을 떴다. 시인은 세상에 없으나 좋은 시는 남아 우리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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