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약속 없는 길에 서다 - 허순위

마루안 2016. 1. 12. 00:52



약속 없는 길에 서다 - 허순위



그곳은 떨어져서 손톱의 반달이 되었다
그곳을 밀어올리자, 개미들은 분주했지만
무엇이나 만져보면서 둥글거나 뽀족한
모서리를 만드는 것이 살아가는 날들의 한계였다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갈 수 없는 그곳.
멀어지며 선명한 새들의 그림자가 되시라.
결국 이렇게 되었다, 개 같이 쫓기고 닭 같이
쫓기거나 칭칭 감기거나 꾹꾹 눌리우거나
잘못 든 길도 길이 되어서
쓰러지는 것도 길 안에서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도처에 도둑같이 든 밤의 실개울을 만나야 하는 세상
낯선 길이 숨만 붙은 행인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으니 길을
조금 비워두기로 했다. 가싯길에도 따뜻한 저의 본분이 있다면
닫힌 문고리 안에서 붙잡고 왜
붉게 터지는 글라디올러스를 나는 스스로 택하였는지
한오백년 지나면 시간은 입술을 열리란다.
모르는 중에 사건들은 우연 우연 터지고
사건 속에 비틀거리며 다만 자꾸 나는
그곳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계곡까지가
내가 일어서야 할 끝이라며 바스라져 내렸다



*시집, 포도 인 아이, 들꽃








벼랑 보내기 - 허순위



벼랑은
갑자기라는 말 같지?
비명의 입술 꿀꺽 삼킨
검은 외짝문 같지?
그림이면 지독한 절경일텐데
마치 정전된 엘리베이터 그 속 같지?
똑, 똑
안에 누구 있어요?
글라디올러스꽃을 든 의자왕 있나요?
꾀꼬리떼 같은 삼천궁녀 있어요?
보세요 천지사방 봄이 왔어요
나와서 세상 다시 보시겠어요?


벼랑을 두 발로 꼭 밟고 서서
그 아래
꽃잎 싣고 서천 가는 강물
지옥에서의 한 철 희롱이라도하듯
반들거리며 가는 물빛 좀 보시겠어요?


돌 보다 견고한
고통의 광택
실바람이 거푸 내 눈썹뼈에 문대어 바르고 있어요





# 허순위 시인은 1955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부산대 지구과학과를 수료한 후 대한신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했고 1990년 무크지 <90년대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라가는 희망>, <포도 인 아이>, <소금집에 가고 싶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