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온한 사랑 - 김승강

마루안 2016. 1. 19. 00:52



불온한 사랑 - 김승강



너와 내가 짐승으로
사랑한다면
겨울날 살얼음 진 빈 논에서
태어날 때 그대로 알몸으로
무심하게 마른 짚을 씹고 있는
암소와 수소처럼
알몸으로 있어도
누구의 눈에 띄겠느냐
누가 눈길 한번 주겠느냐


그러나 너와 내가 사람으로
사랑한다면
온 세상 눈이 일제히
깊어지고 그윽해지겠지
그때 우리의 수줍은 알몸은
어디에다 숨길 수 있겠느냐
다 저녁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떼처럼
우리의 사랑을 받아줄
어느 나라가 있어
망명할 수 있겠느냐


우리 사랑은 들킬 각오를 해야겠다.
태어난 자리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겠다.



*김승강 시집, 흑백다방, 열림원








가을산 - 김승강



젊어서는 바다로 나가서
목울대로 밀물로 차오르는 슬픔을
가래침 뱉듯 내뱉었지


나이 들면서 산을 더 좋아하게 되었네
저 가을산을 보라지
불콰하게 낮술에 취해서
자꾸 타오르는 저 낯을 보라지


개망초꽃 덤불 속을 기어가는
살진 철검사가 아니었다면
그 독사가 흔든 개망초꽃 꽃대궁의
그림자에 놀라 포물선으로 날아오르는
수꿩이 아니었다면
가을산은
미친년 곱게 화장하고
없는 님 마중 가는 꼴이었을 거라고
생각해보네


내 신발은 뒤축이 한쪽으로만 많이도 닳았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가을산이 좋아졌다네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애 한번 하기로 작심한 가을산
저 타오르는 불길을 보라지
저 슬픈 열정을 보라지


하늘 끝에는
젊은 날 내뱉은
내 가래침 한 점
뭉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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