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워버리기도 전에 - 박수서

마루안 2016. 1. 19. 09:35



지워버리기도 전에 - 박수서



거품을 물고 모래덤불에 떨어지는 유성을
이 악물고 모르는 척 도리질을 했다
나 지금 흔들리느냐고,
뻘밭을 향해 송송 뚫리는 가슴을 잘라 버리려고
상처 난 집게발을 옴지락거려보지만
도대체 무슨 운명인지 가슴 가까이만 이르면
찌르르 감전되어 버린다
후우 바람이 불어왔다
바늘구멍 같은 눈에 자꾸 파도가 일었다
밀물떼처럼 튀어 오르는 짭조름한 액체
너 지금 따뜻하냐고,
너에게로 가려는 집게발을 쓰윽 지워버린다
그래도 향하는 빨판처럼 쉼 없이 마셔버리는
심장 쪽 그 기억(기억한다는 것은 추억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추억 때문에 기억이 아픈 것이다)
지워버리기도 전에 유성은 떨어져 버렸다
등대 빛에 반사되는 모래알들이 밤새 뒤척인다
나 지금 돌아가냐고, 아니라고
다시 유성이 떨어지기 전에는
뚫린 가슴에 속속 유성 빛이 박히기 전에는



*시집, <흑백필름 속에서, 울고 있다>, 초록배매직스








폭설 경계 - 박수서



낮부터
늘어진 휴일 달력 한 장의 꿈으로
죽은 자를 만나고 오는 나는
포르말린 상태로 영(靈)의 경계에
바짝 들러붙어 있다
마른 겨울을 동굴 속에 두었다 꺼내
비린내나는 되새김질을 해대는 그가
씹으면 씹을수록 눈발을 미치게 만드는
힘 꽤나 쓰는 주력(呪力)을 자랑하여도
나는 우두커니 바라볼 뿐,
대낮의 폭설을 잡아둘 엄두조차
철썩철썩 쌓이는 무덤의 높이도
몰랐다
삶의 가장 게으른 성감대로부터
올라온 눈발은 꺼칠한 손바닥을 어루만지고
사. 주. 팔. 자로 늘어진
케이블 선을 무 뽑듯 뽑아 버린다
어쨌거나 한 번 죽기는 죽어야겠다
그가 찾아온 날은 언제나
밖보다는 안이, 몸보다는 마음이
폭설로 정체되었지
결빙구간을 맨발로 걸어온 그가
먼저 손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를 순순히 따라갔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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