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어 - 김명인

마루안 2016. 1. 10. 22:40



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어 - 김명인



길을 헤매는 동안 이곳에도 풀벌레 우니
계절은 자정에서 바뀌고 이제 밤도 깊었다
저 수많은 길 중 아득한 허공을 골라
초승달 빈 조각배 한 척 이곳까지 흘려보내며
젖은 풀잎을 스쳐 지나는 그대여 잠시 쉬시라
사람들은 제 살붙이에 묶였거나 병들었거나
지금은 엿듣는 무덤도 없어 세상 더욱 고요하리니
축축한 풀뿌리에 기대면
홀로 고단한 생각 가까이에 흐려 먼 불빛
살갗에 귀에 찔려오는 얼얼한 물소리 속
내 껴안아 따뜻한 정든 추억 하나 없어도
어느 처마 밑
떨지 않게 세워둘 시린 것 지천에 널려
남은 길을 다 헤매더라도 살아가면서
맺히는 것들은 가슴에 남고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막막하여
길목 몇 마장마다 묻힌 그리움에도 채여 절뚝이며
지는 별에 부딪히며 다시 오래 걸어야 한다



*시선집, 따뜻한 적막, 문학과지성








오징어뼈 - 김명인



폐광 되자 광산은 빚만 남겨서
어머니 밥집 닫으시고 다시 허구한 날
막내 업고 장터 떠도시었다
가도 끝없는 날들 찬 물결 무심히
구겨지는 모래펄 따라가면
어디서 밀려온 오징어 뼈 몇 개
좋던 시절의 노을은 아름다웠지만 석탄 캐던
장정들도 떠나가버려
종종치던 물총새 울음에 홀로 묻혀가던 그해
늦가을까진 형님조차 소식이 없고
배고픔에도 기대 그리움도 나 혼자 하릴없어서
그 뼈 부숴 흰 가루로 바다에 뿌리면
돌아와 물 가장자리마다 뿌옇게
진종일 붐비던 파도 안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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