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수 구항(舊港)에서 - 황동규

마루안 2016. 1. 9. 10:31

 

 

여수 구항(舊港)에서 - 황동규

 

 

늦겨울 어둑어둑 무렵
횟집 '삼학' 가파른 층계 이층에 올라가 창가에 앉아
술상 기다리며 밖을 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모진 외로움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저녁인데도 불빛은 새 항구로 가고 없고
깃발 흔들던 바람도 가고 없고
불을 채 못 끈 배 한 척이 부두 한편에 매달려 있었다.
사내아이 하나가 서툰 자전거를 몰고
가로등 불빛 속으로 들어와 핸들에서 두 손을 떼고
아슬아슬 축대 가장자리를 스쳐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술로는 더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는 형상!
이 밤은 별나게 깊어갈 것이다.

 


*시집,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겨울 저녁, 서산에서 - 황동규

 

 

어른대던 사람들 둑에서 내려가고
한참 만에 사람 하나가 새로 올라간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던 금 천천히 풀어지고
언제부터인가 눈이 자꾸
안 보이는 것을 찾고 있다.
바티칸이 감추어두었다 이따금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벽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얼굴의 눈이
열심히 미켈란젤로를 찾는 그런 겨울 저녁,
눈 친 벌판을 둘러보는 동박새의 눈,
한 점 두 점 눈발이 시작되다 빗방울이 되어 날기도 하는
그런 저녁,
가창오리 몇 마리 날아올라 허공을 휘돌다 사라진다.
김용배의 설장구, 그 시원한 끄트머리!
빗방울 몇이 얼굴을 따갑게 때린다.
손사래를 친다.
지금 이곳이 지구 속인가 밖인가?
생각하다 말고 바람이 불고 있다.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황순원 소설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