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 박승민

마루안 2015. 11. 4. 10:47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 박승민


늦가을 볕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가만히 감았다 놓았다 하는 사이

뒷산 갈참나무숲에는
누가 죽어 가는지
흙이 붉어 가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장수반점을 지나
흥농종묘를 지나
고추밭에 든 추월댁
체육복 등에 기대인 채
둘은 한참 동안 따사로운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어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서

수숫단 꼭대기
잠자리 마지막 날개 위에서
한 줌 골고루 금광(金光)으로 번진 뒤에야
턱, 숨을 내려놓는데

체육복 등엔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는데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너에게 - 박승민


나와 동승한 너는 불운했다

살아갈수록 희망은 우리의 손끝을 벗어났으니
강물을 얼리고 난 찬바람이
우리의 무량한 가슴으로 밀려와
삶은 다만 찬 기러기 떼 몇 폭 끼룩대며
북편을 넘는 것이었다

어떤 길은 가지 못했고
어떤 길은 갔으나 막다른 골목이었다
내가 써낸 대답이 명백한 오답으로
저렇게 치욕처럼 꾸불꾸불 떠밀려와도
내가 청춘을 다하여 기어간 자리이기에
한 닢도 버리지 못하겠다

그 대가로 옥탑방 난간까지 밀려왔지만
사랑이란 미명하에
우리가 이 고물차에 탑승한 이상
네 운명에 울지 말고
지지도 말며
타이어 밑바닥
눌릴수록 더 단단해지는 탄력으로
한세상 힘차게 가속하라

 

 

 


# 박승민 시인은 1964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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