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온몸이 전부 나사다 - 하린

마루안 2015. 9. 29. 23:18



온몸이 전부 나사다 - 하린



하청에 하청을 거듭할수록
본체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사내들이
자취방에 모여 라면에 소주를 마시며
음란비디오를 보던 밤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이 나온다
씨발로 시작해서 좆도로 끝나는 환각제 같은 배설물이
밤하늘 가득 사정되고 서러운 별들은 촘촘해진다
매혹적인 망사스타킹의 여자
아! 신음소리까지도 친절하다
더 이상 체위는 신선하지 않고
떠난 애인들만 머릿속에서 지쳐간다
그렇게 욕구불만의 밤은 섣부른 발기로 졸아들고
꿈속에선 CF 속 여자 배우와 자동기계가 되어 섹스를 한다
에어컨을 선전하며 바람을 매번 일으키는 인기 절정의 여자
그녀가 재생시키는 웃음의 값은
이십 년 동안 결근 한 번 안 하고
나사를 박아야 하는 질긴 시간의 값이다
하루 종일 이천 개도 넘는 수나사가 암나사와 만난다
나사들은 화려한 디자인에 갇혀 죽었고
생각은 모두 단순화되어 규격 박스 안에 담긴다
더러는 조인 나사를 풀고 싶어 떠났던 녀석도 있다
조금 더 안쪽의 중심부품으로 살아 보겠다고
라인을 자꾸 변경하다 다시 아웃사이더로 밀려난
옥탑방 구석에 버려진 소주병 같은 녀석들
그 녀석들 다 돌아와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포르노를 본다
온몸이 전부 나사인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청산가리 사내들
신나를 들이붓고 싶은 밤을 지난다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낙서공화국 - 하린



버스 터미널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옆집 누나나 친구 누나와 섹스를 했다는 어지러운 낙서들을 본 적이 있는가


원형으로 태어나는, 무의식으로서 꿈틀대는 온갖 알몸들 정성들여 그려본 적 있는가


화장실 벽에 그려진 성기를 대표적인 상징주의 그림이라고 말하는 친구를 한껏 비웃어본 적이 있는가


'동성연애하실 분' '장기 고가 매입'이라고 적힌 벽면의 전화번호 앞에서 삽입과 매입의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거기 적힌 가격이 너무 싸다고 중얼거리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여 오르가슴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때 창을 들고 사냥감을 탐색하는 모기와 눈이 마주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적이 있는가


힘주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넥타이 끈을 풀어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다 차 시간에 쫓겨 아쉬운 뒤처리를 남긴 채 조급증 환자가 되어 막차를 타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낙서처럼 살아가는 낙서공화국 시민입니다






# 하린(河潾) 시인은 1971년 전남 영광 출생으로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광주매일> 신춘문예와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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