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호시절 - 심보선

마루안 2015. 9. 22. 23:11

 


호시절 - 심보선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어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낙화 - 심보선



어느 지상에 가을이 임하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빛이 만인(萬人)의 발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낙화의 순간
누군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누군가 넘어지고
무언가 잘못된다
아직은 인간인 고아(孤兒)가
가족과 이웃
좋은 이와 나쁜 이를
구별할 수 없어 모두가 그리웁다
떨어지는 꽃이여
찰나의 귓바퀴를 맴도는 시간의 방랑이여
누군가 급히 거둬들인 시선이여
무언가 슬피 가리키는 손가락이여
지상의 어느 문에도 맞지 않아
허공에서 영원히 헛돌고 있는
고단한 열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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