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 임경섭

마루안 2015. 9. 29. 23:09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 임경섭



허리 굽은 노인이 깊은 꿈속으로
고이고 있는 새벽
선잠에 돛을 달아 물결을 따라가보려 했지만
꿈은 몸을 뒤척여 자취를 감추고
노인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잠을 설치고 일어나보니
갈현동 이 좁은 골목으로도 계절이 꺾여 들어오고 있었다
길 위로 시간은 무수히 흘러갔지만
모퉁이 담벼락 앞에 다시 피는 산수유,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새벽 창의 중심에 붙은 산수유를 따라
다닥다닥 눌어붙는 생각들, 순간
한 노인이 창의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빠르게 지나갔다
노인의 종적에 대해 질문하지만 대답해줄 이는 없다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잠을 설치고 부스럭댈 때마다
말없이 깨어 있던 어머니는 없다 살아 있다면
백발이 성성했을 어머니는
젊은 그대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늙은 어머니를 슬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젊은 어머니는 드물게 다시 찾아와
골목 위의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연못처럼
밤 속에 고였다, 간다



*임경섭 시집, 죄책감, 문학동네








우두커니 - 임경섭



출근길에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선로는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
그 위에 서서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등이 아주 작게 말린
가난한 아비 하나가 선로 위에 누워 있던 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의 등을 긁어주었던 거다
좁게 파인 등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등이 작으면 저 긴 잠 일렁이는 물결에도
별자리들이 출렁이지
출렁이기 마련이지,
혀를 찼던 거다


외할머니 연곡 뒷산에 묻고 오던 날
어린 그에게 감을 따주었다는 셋째 외삼촌과
그날 따먹은 건 감이 아니라 밤이었다는 첫째 외삼촌,
그는 그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던 거다
혹은 이듬해 연곡천에서 끓여먹던 개장국 안에
흰둥이의 눈깔이 들어 있었다는 사촌누이와
처음부터 대가리는 넣지도 않았었다는 막내의 실랑이,
그는 그 사이에 끼여 들리지 않는 발음이었던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러니까 선로 밖으로 휩쓸려나가
처음 보는 동네 정류장에서
노선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달려오는 전동차 밑으로 몸을 눕히지 못할까
그리하여 수십 수백의 출근길을 몇십 분이라도
훼방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





*시인의 말


멀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헤어짐은 다른 의미의 마주침이다. 13년을 새로운 당신과 살았다.


첫 시집을 묶고 나서야 모든 말은 오해로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13년 동안 당신을 오역했다. 이것이 내 죄책감의 근원이다.


무한의 방향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엄마들이 있다. 꿈이다. 꿈만큼 정직한 해석이 있을까?


지금은 생시이므로, 내 기록이 철처히 오해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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