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조팝꽃 눈물 - 서상만

마루안 2015. 9. 15. 23:51



조팝꽃 눈물 - 서상만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팝나무 흰 꽃길을 말없이 걸어갑니다


나는 슬그머니
늙은 그녀의 추억 속을 들여다봅니다


세살 때부터
아내를 맡아 기르던
그 매산(梅山) 외갓집 울타리, 조팝나무와
봄이 앉은 느티나무 마을길을 찾아갑니다


나이만 들어,
이제는 영영 다시 못 갈 거라며
조팝꽃같이
흰 눈물을 똑 똑 흘렸습니다



*시집, 모래알로 울다, 서정시학








아내의 발톱 - 서상만



한 십 년
내 손으로 아내의 손톱 발톱을 깎아주었다
한 오 년은 힘없어도 겨우겨우
예쁜 손톱을 내밀며 조금은 자신 있게
못생긴 발톱을 내밀며 조금은 부끄럽게
넌지시 미소를 건네주던,


그 후 한 오년은 미소마저 잃어버린 채
맥 없이 지쳐버린 그녀의 손톱 발톱
그 긴긴 날들이 한순간의 꿈같다
그럼 누가
무덤 속에 자란 손톱 발톱을 깎아 줄까
어느새 내 슬픔도 이만큼 자랐는데


어디쯤 갔을까
이제는 따라가지 못할 이승의 밖
당신과 나는
수억 년을 건너뛴 공간 밖이라는데


오늘 따라
남한강 아침안개에 젖어 있을
아내의 하얀 발톱이 그립다





# 아내를 떠나 보낸 노시인의 순애보가 애틋하게 다가온다. 오랜 기간 병상의 아내를 봐왔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일생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시를 읽으면 운명이란 세상에 나올 때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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