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침내 다다른 경지 - 주종한

마루안 2015. 3. 5. 11:08



마침내 다다른 경지 - 주종한



사람이 사람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너무 좋아 사람을 그냥 돕는 것이
이제야 뒤늦은 만학의 감회이거나
빙빙 도는 잠언의 경지


떼돈을 벌거나, 뭔가 기념비적인 선례를 남기거나
남들을 잘 웃기거나, 유별나게 잘났거나
남들의 비위를 잘 맞추거나, 밤일 하나는 끝내주거나
뭔가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잘 하는 게 없으면
사람을 사람들로부터 절대 사랑받지 못한다
낳아준 부모도 분통을 터져 한다
한번 살아봐라, 이것아, 세상살이란 게
한겨울 칼바람 맞듯 소스라치는 인연의 뒤안길이다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사랑을 주고받지 못해 홀로 걷는 사람들의 옷깃에서
그 옷깃이 감추고 있는 쓸쓸한 눈빛에서
이 도시의 인생살이라고 하는 애달픈 사연들이
참 각박하게 과소비 된다
각막이 저절로 우는 경지이다



*시집, 끝이 없는 길, 서정시학








벼랑 위에서 - 주종환



밤하늘, 무한한 정전기 같은 침묵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듯
너무나 셈세한 신체를 다친 것 같은,
말들이 꽃잎처럼 떨었다


아찔한 적막,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행성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고독,
자신들의 별자리를 향해
한밤 내 부스럭대는 풀숲의 온갖 발자국 소리처럼


영원의 일별(一瞥) 같은 허공,
그 머물 수 없는 머묾의 경계 위에서
누군가 나를 밀었다
나는 심하게 다쳤고 절룩거렸다
누군가 등을 떠밀고 싶을 정도로
돌아앉아 있으면 안 된다,
존재계라는 등골이 오싹한 깊이 속에서는,
각자 자신이 떨어져 본 가장 깊은 벼랑을 메고
노잣돈이나 얻자고 쉼 없이 오가는 첩첩산중이다, 세상은.


어느 먼 훗날
나의 등을 떠민 그 누군가가
나 자신으로 밝혀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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