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연둣빛, 터널 - 박연준

마루안 2015. 3. 5. 10:50



늙은 연둣빛, 터널 - 박연준



어느날 밤, 내가 침대 끝자락에 매달려
쏟아지는 피처럼 녹고 있었을 때
딱지 아래서 울고 있을 싱싱한 상처와
미라처럼 죽음으로 꽃피울 아침과
마침표 위로 서툴게 떨어지는 말,
뒤늦게 대가리를 박으며 흐느끼는 말들과
다만, 엮이고 싶었다


거미의 가느다란 다리가 내 텅 빈 몸을 감싸쥐고
늙은 연둣빛, 터널을 지나자
죽겠다고, 떨어져내리겠다고
마른 가지 위에서 꽃들은 시위를 하고
진딧물들은 내 이빨 사이로 파고든다, 더이상
봄은 없을 거라고
거미들은 바삐 다리를 놀리고
실타래를 풀어 오선지를 만든다
오선지 위에서 무너지는 음표들은 노래한다
늙지 말아요, 얼굴이 노란 죽음이여
직각으로 뻗은 하늘이여-


나이를 먹는다는 건
조금씩, 넓어지는 감옥에 갇히는 일이라고
바람이 불고, 벽이 자란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기울어진 방 - 박연준



방문 틈 사이로 어둠이 들어온다
어둠을 품에 안아 젖을 물린다
젖을 빠는 어둠이 이따금 콜록일 때마다
짙어지는 밥의 농도, 불시에 떠오르는 별들
혼자 저만치 굴러가는 물컹한 기억


내 몸 어딘가에 눈물을 쏟아놓고 사라진 남자는
눈물이 굳어 혹이 될 때까지 소식이 없다
남자의 망각은 내 살을 조금씩 쪼아먹는다


기울어진 방,
나는 빨간 침대 끝에 비스듬히 누워 잔다
내가 젖을 물려 키운 어둠은 낯설게 자라고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깜박이더니 이윽고 어둠에게 먹힌다
나는 까맣게 타버린 두 덩이 젖을 포장한다
네모난 상자에 담긴 그것을 옥상 아래로 떨어트리면
허기진 밤이 커다란 손으로 낚아채간다, 순식간에


나는 아침이 올 때까지 무릎을 바짝 끌어안고
열네살, 팬티 속 빨간 비밀을 반견했을 때처럼
조용히 기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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