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삼류가 좋다 - 김인자

마루안 2015. 2. 1. 23:57

 

 

나는 삼류가 좋다 - 김인자

 
 

이제 나는 삼류라는 걸 들켜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아니 나는 자진해 손들고 나온 삼류다. 젊은 날 일류를 고집해 온 건 오직 삼류가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삼류 하면 인생의 변두리만을 떠올리지만 당치 않은 말씀 일류를 거쳐 삼류에 이른 사람은 뭔가 다르다. 뽕짝이나 신파극이 심금을 울리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편해 오래 입어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낡은 옷 같은 삼류. 누가 삼류를 실패라 하는가. 인생을 경전經典에서 배우려 하지 말라. 어느 교과서도 믿지 말라. 실전은 교과서와 무관한 것. 삼류는 교과서가 가르쳐 준 문제와 해답만으로는 어림 없는 것.

 


*시집,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여음

 

 

 

 

 

 

이의(異意) 신청 - 김인자


 

딱지를 발부 받고 이의 신청을 한 건 나였다
솔직히, 47년 허술히 마모된 내 인생
한 번쯤 판관(判官) 앞에 세우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자
삶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이건 아니라고
늦은 감은 있지만 이의(異意)있다고 손들고 나선 건 잘한 일이다
애초 내가 겁냈던 건 탁한 정신이었지
불운한 삼류는 아니었으니까


이의 신청자를 법원으로 호송하던 경관은
아침부터 늘어지게 하품을 했고 가끔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불렀다
나는 지금 어디로 호송되고 있는가?
잠시 후 판관은 내게 일러줄 것이다
내 생의 모든 죄와 벌과 앞으로의 좌표까지도


판사가 입장하자 사람들은 모두 기립했다
여기까지는 영화에서 본 그대로다
내 인생도 영화에서 본 그대로라면?
나는 잠시 꿈을 꾸었다


이름이 호명되자 정신을 차리고
나는 나를 판사 앞에 세웠다
무엇을 근거로 무죄를 인정받으려 했던가?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항복하자고 말하고 싶은
내 속에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 이건 뭔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 나는 재판을 끝냈다
그렇게 바라던 재판이었지만, 나는 안다
판사가 아무리 무죄를 선고한다해도 나는 유죄다
47년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유죄의 알리바이는 충분하다
나는 또 하나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겼다
호송차 안에서 잠시 본 푸른 하늘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 김인자 시인은 1955년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이 있다. <아프리카 트럭 여행>, <걸어서 히말라야> 등 시집보다 많은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