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곳이 어디쯤일지 - 강인한

마루안 2014. 11. 24. 22:35



그곳이 어디쯤일지 - 강인한



엷은 새벽빛이 흘러와
벽에서 4호 액자가 떠오른다
삼십 년 전 전라도 어느 개울과 산이 날것으로 숨쉬다가
젊은 화가의 선과 색채를 입고
이 작은 액자 속으로 들어온 것이니
그 곳이 어디쯤일지


내 어린 날 어느 겨울이었으리
곤죽이 된 논바닥에 고무신 푹푹 빠지며 연을 날리는데
까마득한 하늘에서 홀연 실을 끊고 사라져버린
그 연의 행방이여
첫 여인의 소식처럼 지금도 슬프고 궁금하다.



*시집, 강변북로, 시로여는세상

 







검은 현존 - 강인한



모과나무가 대문 밖에 나와 비를 맞고 있다
장미과의 수피에
불신처럼 이끼가 덮였고
턱에 걸린 명찰에는 빗물이 얼룩진다
그런즉 한참 멀리서 왔다, 그대는


어떤 상처는 고집이 세다
중학교 일학년 때 뒤에 앉은 아이가
갑자기 펜을 들어 찍어버린 내 손등
한 방울 피의 결정으로 손등에 그 점이 살아있다


그때, 질풍 같은 분노의 일격과
그 아이도 나도 길항의 내용에 대해서 지금은 잊었지만
은근한 비밀로 내 몸은 기억하고
나를 각성시킨다


모과가 찾아가는 뒤틀리고 먼 기억의 통로
놋날처럼 쏟아지는 빗발 아래 희미한 장미의 가계
누가 끄집어낼 것인가, 장미도 모과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 집을 나온 장미 중의 어떤 가여운 따님이
오래도록 모과나무로 검게 살아가는 현존이 있을 뿐
이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모과나무의 본적을.





# 어릴 적의 기억이 많지 않은 내게 이런 시가 위안이 된다. 기억력이 없는 탓도 있지만 어쩌면 그 시절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들 유년의 추억이 그립지 않겠는가. 때론 잊고 싶은 상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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