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인간의 조건 - 한승태

마루안 2014. 11. 19. 21:23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님 반항하고) 세상을 겉돌던 한 젊은이가 한국 사회의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 제목인 <인간의 조건>이 유명 문학 작품도 있고 너무 흔한 제목이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주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을 한다. 형식은 르포에 약간의 소설을 보탠 것이라 해도 되겠다.

저자 한승태가 경험해 이 책에 기록한 직업은 다섯 개다. 진도-꽃개잡이. 서울-편의점과 주유소, 아산-돼지 농장, 춘천-비닐하우스 농장, 당진-자동차 부품 공장이다. 이곳의 모든 노동자는 최저 임금을 겨우 받거나 그에 못 미치는 금액을 받으며 일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아주 귀하다. 저자가 입사 때마다 들은 말이 "정말 한국인 맞아요?"와 "신기하네."였다. 그만큼 노동 강도는 세고 근무 시간은 길어 한국인이 웬만한 결심으로는 적응을 못한다. 휴일도 모든 업주가 담합이라도 한 듯 한 달에 2번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일해서 겨우 백 만원 조금 넘는 임금을 받으며 일할 한국인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 대고 어떤 전직 대통령은 요즘 젊은이들이 배가 불러 취업을 안 한다 했다. 냉난방도 안되는 컨테이너 숙소에서 고추장과 김칫국에 맨밥을 먹고 막사마다 넘쳐나는 돼지똥을 치워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거다.

저자는 밥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실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참고 몇 달씩 버틴다. 가물에 콩나듯 입사한 한국인이 노동 현실에 질겁을 하고 하루 이틀 만에 그만 둔다. 그 자리는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지한다.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우즈베키탄인 등, 월급 백 만원을 고임금이라 생각하는 나라들이다. 어쨌든 이 일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먹는 삼겹살과 치킨 셋트가. 꽃게탕이, 방울토마토가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나온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서울 시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그런 노동력으로 나온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드는 식당 주방에 들어가 보라.

주문 받고 쟁반 나르는 조선족 이모들은 일반화된 지 오래고 주방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중국인, 몽골인, 내가 사는 신촌은 요즘 베트남 종업원들이 많다. 그들이 생산한 재료에 그들이 요리한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마지막 장인 퀴닝(Queening)은 다소 충격적이다. 이미 다섯 번의 장에서 충분히 단련이 되었어도 이 장은 왜 저자가 카드놀이에 나오는 퀴닝이라는 제목을 정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작가는 육체 노동자가 아니라 육체적 작가라 불러야 어울릴 듯하다.

꽃게잡이 배를 탔던 한 청년이 그만 두겠다고 한다. 서울의 직업소개소에서는 6개월만 열심히 하면 2천 만원은 충분히 모을 수 있다는 (한 달에 3백 만원 이상 급여를 받을 수 있단다) 호객(?)행위에 넘어간 것이다. 기본급 1백 만원에 고기를 잡은 만큼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많아진단다.

그 말에 혹해 배를 탔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먼저 와서 일하고 있는 선배 선원들은 기본급인 백 만원도 몇 달치 밀렸다고 한다. 선주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서라며 곧 지급할 거라 달래고, 밀린 임금을 포기할 수 없는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을 한다.

일찍 실상을 깨달은 청년이 그만 두겠다고 하자 선주는 그 동안 쓴 경비(먹고 잔 비용)를 토해내야 보내준다고 한다. 청년은 울면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나 되레 선주는 폭력을 행사한다. 견디다 못한 청년이 근처 파출소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나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선주 부하들의 감시만 늘어날 뿐이다. 업주(선주), 직업소개소, 경찰 등이 삼박자를 이룬다.

작가는 직장 동료이자 동생인 이 청년의 상황을 보고 함께 도망가기로 결심한다. 죄수 빠삐용의 탈출을 보는 것처럼 도망자의 열정과 스릴이 읽는 이를 긴장하게 한다. 영화 같은 섬에서의 탈출 과정은 생략하겠다. 저자는 무사히 섬을 벗어나 목포에서 청년과 헤어지고 서울로 걷기 시작한다. 퀴닝의 마지막 여정이다.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소설보다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책이다.

# 이 책을 읽고 나자 저자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생겼다. 르포가 문학의 한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 장르의 책이 드물다. 한승태 작가는 창원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춘천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덜컥 사회라는 것이 눈앞에 다가왔고 하고 싶은 일이 글 쓰는 것임을 기억해냈다.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출판되지 못할 게 분명한 시와 소설을 썼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