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병 - 이문재
저울질하며 추적추적 걸어왔구나
노을에 발목이 빠지면서, 빈 하늘에 버린 이름들
속에서 해진 나를 찾고, 찾으며
어허, 한 번 웃는 것인데 쓸데없이 저울질하며
여기까지, 언제나 시작인 마지막의
노을, 그 실뿌리에 감기며 문득
새빨개지는 피를 흔들어보는 것이구나, 어허
살어라 살어라 하는구나, 그래, 노을에 흥건히
빠진, 빠져 있는, 이승의 발목을 건지면서
뒤돌아보면서, 기우뚱거리면서
소금기 많은 웃음을 몸 밖으로 흘려 봤구나
저녁이면 사람의 서쪽이 붉도록 아픈 병, 전염은 되지 않으나
여간해선, 고치기 어려운
어허,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민음사
다시 황혼병 - 이문재
누추한 자신의
그림자를 어둠에 슬그머니 넘겨주는 습관
나의 서쪽과 사람의 서편은 늘 빗나가 있고
흥건한 노을, 놀빛
하루는 그렇게 타버려야
어두워지나 보다 그런 순간이면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나와 사람의 간격이 칠흑처럼 보이지 않을 때
슬그머니 지나온 하룻길이 어처구니 없어져서
죽은 피 뽑아버린 만큼 술을 퍼마신다
술을 마신 만큼 캄캄해진다
그림자 있던 자리가 쑤셔온다
# 1988년에 나온 이문재 시인의 첫 시집이다. 내가 읽은 것은 1997년에 나온 개정판이다. 그래도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기형도 시집과 함께 내가 가장 자주 꺼내 보던 시집이다. 그 때는 지나쳤던 시가 다시 보인다. 시집도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 더 친해졌다. 좋은 시는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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