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설의 발생 - 최금진

마루안 2014. 11. 12. 21:29



소설의 발생 - 최금진



별과 별이 봉화처럼 연결되어 별자리를 만들고
어둠의 보이지 않는 샛길까지 환하게 잇고자 했던
지혜로운 여행자들의 지도가
훗날 소설의 기원을 이루었을 것이다
누가 처음 이 외딴곳에 와서 들꽃과 바람을 읽고
거기에 밑줄을 긋고
제 살과 뼈로 써내려간 집 한 채를 지었을까
화순 최씨 집성촌이 있다는
외딴 마을 어딘가를 내가 헤매고 있었을 때
그 후손들 중 하나가 연줄처럼 아득히 풀려나가
바람 부는 허공을 헤매고 있을 때
땡감처럼 매달린 별 몇개로도 제 아비를 읽는 밤
하늘과 땅은 책의 앞뒤 표지처럼 맞물려 있고
깨알 같은 인간의 이야기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아버지의 무모한 여행담이
훗날 더 먼 데까지 나갔다 올 아들의 지도가 되듯
나 또한 오래오래 들려줄
뼈까지 닳은 내 역마를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읽어야 한다고
내 나이 무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를
나는 책망하듯 그리워했다, 그리고
근처 어딘가에 화순 최씨 집성촌이 있다는
불 꺼진 밤하늘을 펼쳐놓고 나는 몇번이고
어둠이 만든 행간의 의미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시집, 황금을 찾아서, 창비








길에서 길까지 - 최금진



아홉살 땐가, 재가한 엄마를 찾아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한번도 와 본적 없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오줌을 싸고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길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땐 한 여자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막차를 놓치고 대신 잭나이프와 장미 가시를 얻었다
무허가 우리집이 헐리고, 교회 종소리가 공중에서 무너져내리고
나는 골목마다 뻗어나간 길들을 모두 묶어 나무에 밧줄처럼 걸고
거기에 내 가느다란 목을 동여맸다
노랗게 익은 길 하나가 툭, 하고 끊어졌고 나는 어두운 소나무밭에서
어둠의 뿔 끝에 걸린 뾰족한 달을 보았다
대학에 떨어지고 나는 온몸에 이끼가 끼어 여인숙에 누워 있었다
손 안에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길 하나를 태워 물었다
미로 속에 쥐를 가두고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를 연구하는 실험은
쥐들의 공포까지는 배려하지 않지만
눈 내리는 숲속의 막다른 미로에서 내가 본 것은
얼굴이 하얀 하나님과 술병을 들고 물로 걸어들어간 아버지였다
폭설과 안개가 번갈아 몰려오는 춘천
그 토끼굴 같은 자취방을 오가며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은백양숲에선 길을 잃어도 행복했다
은백양나무 이파리를 펴서 그 위에 빛나는 시를 쓰며
세상에서 길을 잃었거나, 스스로 길을 유폐시켰던 자들을 나는 그리워했다
길들을 함부로 곡해했고 변형시켰으며
그중 어떤 길 하나는 컵에 심은 양파처럼 길게 자라
달까지 가닿았다, 몇 번이고 희망은 희망에 속았다
달에 들어가 잠시 눈 붙이고 난 어느 늦은 봄날
눈을 떠보니, 마흔이 넘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몇번의 사랑도 있었으나
길에서 나누는 사랑, 그건 길짐승들이나 하는 짓거리였던 것
안녕, 길에서 나누는 인사를 나누며
내비게이션으로도 찾아갈 수 없는 절벽을 몇번이고 눈앞에 두었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노선이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체포당한 것처럼 길에 결박된다
풍찬노숙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다시 막차를 놓쳤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더는 가고 싶은 길도, 펼쳐보고 싶은 지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 허무맹랑한 길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마음은 늘 고아와 객지였으니
엄마, 엄마아, 쥐새끼처럼
울고 있던 어린 나에게 따귀라도 올려붙였어야 한 건 아니었는지
낡은 담장에 길 하나를 간신히 괴어놓고 서 있던 늙은 벚나무에선
꽃들이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길을 잃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신은 더 많은 길을 잃게 하는 법
제 몫의 길을 모두 흔들어 떨어버린 늙은 벚나무는 이제 말이 없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길에서 길까지
지상에는 길들이 흘리고 간 흙비가 종일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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