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술잔, 바람의 말 - 김선우

마루안 2014. 10. 17. 18:27



술잔, 바람의 말 - 김선우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유리잔 이전이었던 세계, 바람이 나를 낳고
달빛이 이마를 쓸어주던 단 한 줌 모래이던 때
그때 아직 그리움은 배냇누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내게로 온 그녀는
날개 상한 벌을 백일홍 붉은 꽃잎 속에 넣어주던
마음이 다치기 이전의 그녀였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었다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강물을 길어왔고
입을 것이 없었으므로 맨몸인 우리는
상처에 꽃잎을 달아줄 수 있었다 한 줌 모래이던
사금파리 별을 잉태했던 우리는,


날이 밝기 전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은 지워져
달빛도 백일홍 꽃잎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찾아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몇 마디 욕지거릴 씹어뱉고 독주를 들이키더니
화장을 고치고 나가버렸다
내 가슴엔 선명한 입술 자국,
붉은 씨방을 열고 백일홍 꽃잎 떨어져내렸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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