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 곽효환

마루안 2014. 10. 14. 20:40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 곽효환



바람 깊은 밤, 어느 골목 어귀
불 꺼진 반 지층 창문을 본다
외등 아래 앙상한 몸통을 드러낸 플라타너스에게
무성했던 잎새의 기억을 물었지만 그네는 답이 없다


저만치 서서 나는 인적 없는 창가에 귀 기울인다
그늘에 젖은 시계도 숨죽여 눈시울 붉히는 시간
그녀는 벌써 들어와서 잠이 들었을 수도, 아니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나의 문은 공전의 속도로 열렸고
그녀의 문은 자전의 속도로 닫혔을 게다
한쪽이 다 열렸을 때 다른 한쪽은 끝내 닫히고 마는
푸르던 잎새를 다 떨구고 붉은 꽃을 기다리는 빈 꽃대의 시간


내 몸이 기억하는 그녀와
내 머리가 기억하는 그녀가,
더러는 비껴간 것들과 조금씩 늦은 것들이
쓸쓸하고 공허하고 아프게 뒤섞이는 텅 빈 골목


어른거리는 축축한 물기를 훔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나는 세상의 가장 깊은 어둠에 남겨질 것이다
하여 이 골목 끝에서 다시 그녀를 마주쳤으면
아니 이 골목을 다 벗어날 때까지 끝내 마주치지 않았으면


이렇게 막막하고 이렇게 치명적인
내가 정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집,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








이발소 그림 - 곽효환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아니 삶이 나를 속인다 해도
나는 이발소에 간다
이곳저곳 얼룩지고 벗겨진 거울, 오래된 빗과 가위가 있는
뒷골목 평화이발관


성자께서 열두제자와 나누는 최후의 만찬
'오늘도 무사히'를 간절히 비는 어린 소녀의 경건한 얼굴
전나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는 폭포
금빛으로 물드는 전원에 물레방아 도는 아담한 초가집 한 채
십여 마리가 넘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돼지
우리의 바람과 꿈을 이토록 정교하게 대량으로 모사해내는
삶과 예술이 때론 어설프게 때론 절묘하게 만나는
희망공작소 그림들의 안녕과 풍요를
누가 이발소 그림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이 그리운 풍경과 삶을 누가 싸구려 통속이라 했을까


    어떤 삶이 고단한 당신을 속였는가
    하여 우울하고 슬퍼하고 노여웠는가


시퍼렇게 날이 선 면도칼 아래 하얀 목을 맡겨두고도
곤히 잠을 청하는
평화이발관 그림 아래 안식
빨갛고 파랗고 하얀 낡은 삼색 표시등
하루 종일 털털거리고 도는
저렴한 그러나 대담한 선과 원색의 색채가 내뿜는
아우라가 깃든 내 첫번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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