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석달 - 손택수

마루안 2014. 10. 13. 22:58

 

 

추석달 - 손택수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은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시집, 목련 전차, 창비

 

 

 

 

 

 

장생포 우체국 - 손택수


  
지난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 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도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아귀힘을 절반쯤 따라간 편지
뭍에 올랐던 파도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 손택수 시인은 1970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경남대 국문과, 부산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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