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서 오줌 누고 싶다 - 이규리

마루안 2014. 10. 14. 19:38

 

 

서서 오줌 누고 싶다 - 이규리


여섯 살 때 내 남자친구, 소꿉놀이 하다가
쭈르르 달려가 함석판 위로
기세 좋게 갈기던 오줌발에서
예쁜 타악기 소리가 났다

셈여림이 있고 박자가 있고 늘임표까지 있던,
그 소리가 좋아, 그 소릴 내고 싶어
그 아이 것 빤히 들여다보며 흉내 냈지만
어떤 방법, 어떤 자세로도 불가능했던 나의
서서 오줌 누기는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고 난 뒤
축축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도구나 장애를 한번 거쳐야 가능한
앉아서 오줌 누기는 몸에 난 길이
서로 다른 때문이라 해도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스며있었을까

그 아득한 날의 타악기 소리는 지금도 간혹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듣지만
비는 오줌보다 따습지 않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비어있지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낮달 - 이규리


무슨 단체 모임같은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게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이라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랜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 이규리 시인은 1955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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