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움의 힘으로 - 전동균

마루안 2014. 4. 19. 10:18



그리움의 힘으로 - 전동균

 
 

어두운 구름들이 지붕 위로 흘러갔다
때 이른 푸른 열매들이
마당 한 구석에 떨어져 쌓이고


잠시 환히 열렸다가 닫히는
마음의 창문들, 그 안쪽에
빗방울처럼 얼핏
알 수 없는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햇빛 맑고 바람 찬
전생의 어느 하루, 날개짓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간 새였을까
죽은 나무가 마지막으로 피워올린
만발한 꽃들이었을까
붉디 붉은... 애인의 입술이었을까


금세 사라지는 그 흔적들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한없이 깊어지는 저녁의
눈동자 속, 몇 세기를 건너 온
오랜 그리움의 힘으로


불빛은 깨어나 언덕길을 비추고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고



*시집, 함허동천에 서성이다, 세계사

 


 





세기말의 봄 - 전동균

 

봄인데, 활짝 꽃 핀
세기말의 봄,


인왕시장 앞 늙은 아낙의 좌판에는
물 좋은 생선들이 쌓여 있고
천막 그늘 속, 살아있는 것들의 빛나는 숨결이
푸들대는 푸성귀 잎새마다
물방울로 흩어지는데


나는 그냥 지나간다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지나갈 뿐이다
호주머니에 든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큰 길을 벗어나 기억 속의
좁은 샛길로


- 한때는 이 길을 탁발승이 되어 걸어갔네
-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겨눈 적도 있었네
- 紅燈을 걸어 놓고 밤을 기다리기도 했네


카타콤 같은 골목 끝 선술집에 앉아
홀로 찬 술을 마시며
사라진 몸이 추억하는 한 여자의
빗소리 서늘한 노래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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