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 이상국

마루안 2013. 10. 5. 20:39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 이상국



어느해 봄 그것도 단 한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장에 나가는 염소처럼 뻗디디며
한동안 혼자 뿔질을 해대던 나는


어느날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놓듯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그속으로 들어갔다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 창비








느티나무 아래서 - 이상국



여름이 되자 매미들이 머슴처럼 울었다
느티나무 그늘 속에서였다
내 딸아이는 어려서 그 밑에 쉬를 하고는 했다
그애도 커서 이제는 처녀가 되었지만
느티나무가 아니라면 예의바른 그애가
그런 실례를 할 리 없었을 것이다
느티나무를 두드리기 위하여 소나기는
후드득후드득 아프게 왔고
새들은 아침을 소란스럽게 했으며
가지에 몸을 다친 바람들은
쓸데없이 돌아다니며 울었다
가을에도 그랬다
멀리서 보면 동네가 근사해서
아파트 값이 너무 올라간다고
관리소 사람들이 이파리를 털거나
그의 몸을 잘라내기도 했다
최근에 사람들은 느티나무 때문에 벤치를 만들었으며
거기에 앉기 위하여 노인들은 나이를 먹었다






# 이상국 시인은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으로 1976년 <심상>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등이 있다. 아주 맑은 시를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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