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호박등 - 황지우

마루안 2013. 8. 23. 07:16



호박등 - 황지우



젊은 나이에 암수술을 한 친구를 문병갔다 온다.
그는 이미 알아챈 듯, 질린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 앞에 다가오는 巨한 그림자에 그의 신체 일부가
들어가고 있었다.
내 손에 놓인 그의 손,
짜식,
어린 시절 우리는 이 손 잡고 산으로 들로 쏘다녔었다.
반딧불 잡아 호박燈 밝히며
우리는 밤길을 돌아왔었다.
너의 호박등이 다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이 나쁜놈아,
이 착하기만 착하기만 한 놈,
내 굶을 때 몰래 집으로 고구마 퍼다 주던 놈,
이 징헌 놈아, 살자, 살아. 이놈아.
나는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굵은 핏줄이 돋은
그의 손이 내 손 안에서 움직였다.
그가 내 손을 쥐었다.
느그들은 순리대로 살아라.
개새끼가 곧 죽을 모양으로 말했다.
그는 거침없이, 2년 남았대, 뱉는다.
밖으로 나와 대학병원 12층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順理.
그는 유복자였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1952년생 동갑이다.
순리.
늦여름 밤, 가을 바람이 불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바람 앞에서
나는 돌아서 담배를 붙였다.
깊은 상처에 성냥개비를 그어 보이듯,
불을 감싼 내 손은 환한 호박등이었다.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민음사








나의 누드 - 황지우



공중 목욕탕에 앉아서 제 손으로 제 몸을 구석구석
훑어나가는 것은 한두 주일 동안의 때를 밀어내는
일만이 아니다. 일생이여. 이 부피만큼 살아왔구나.
질그릇처럼 아슬아슬하다. 대저
나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내가 있었던가. 나의 용적이 탕 밖으로 밀어내는 물?
거짓이 나를 만들어놨을 뿐,
두뇌의 격한 질투심. 열등감. 뭐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으로 적재된 서른 몇 해. 헐떡거리며 나는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살아 있다면 내 나이쯤 되는. 가령
전태일 같은 이는 성자다. 그의 짧은 삶이 치고 간
번개에 들킨 나의 삶. 추악과 수치. 치욕이다. 그의
우뢰 소리가 이 나이 되어 뒤늦게 나에게 당도했구나.
벼락맞은 청춘의 날들이여. 나는 피뢰침 아래에
있었다. 나.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요행이었을 것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묵묵부답인 소작농이여. 그는
그가 떠나지 못한 新月里 北平의 방풍림 아래 윤씨
땅을 새마을 모자 채양으로 재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웃 도암재를 넘어 그는 장독 굽는 도공이 되려 했으리.
그는 小木이었을까. 말없고 성깔 괴팍한 미장이였을까.
아 그는 대처에 나와 그의 바람기로 인해 노가다가 되었으리라.
극장 간판장이였거나 방직공장 경비원이었거나 철도 노동자였거나
추운 삶의 시퍼런 정맥을 따라 청계천
평화시장까지 흘러갔으리라. 그는 땔나무꾼. 껌팔이. 신문팔이.
고물장사였었다. 역 뒤. 극빈의 검은 강가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빈 창자로
서 있었고. 내장에 콸콸 넘치는 쓴 하수도. 뜨거운 내 눈알은
붉은 회충알들이 靑天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지러웠다. 현기증 사이로 본 부. 모. 형. 제. 전가족이
각각이 고아였다. 자원입대한 형이 떠난 후
조개석탄을 주우러 침목을 세며 남광주까지 걸어갔었다.
産物을 가득 실은 여수발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최저 생계 이하에 내려와 있는 차단기. 적신호 앞에
서 있던 불우한 날들이여.
풍진 세상 살아오면서 나는 내 삶에,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을 부재로 만들어버렸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자화상이 흉칙하듯. 나는 내가 살던 노천을 복개했다.
캄캄한 여러 지류가 나를 지나갔다.
지나갔었다. 그리고 지나간다.
지금 나는 알몸이다.
내 손이 나를 만진다. 이것이 나다.
때를 벗기면 벗길수록 생애는 투명하다.
낫자국. 칼자국. 자전거에서 떨어져 무르팍에 남긴
상처가 내 몸과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돌아다보니 몇 바가지 물로 나와 같이
목전의 자기 일생을 씻어내는 알몸들.
알몸들이여. 나의 현장부재중인 <나>들이여.
그러나 등 좀 밀어달라고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있다.
이태리타월을 들고 나는 한 노인의 등뒤로 다가갔다.
닿지 않는 나의 등으로.





# 1985년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발문도 해설도 없이 마지막장에 달랑 연보만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이어 나에게는 여전히 그의 시는 난해하다. <나의 누드>도 같은 시집 p147-150에 걸쳐 연 구분 없이 빼곡하게 실렸다. 다소 긴 시지만 아주 술술 읽힌다. 이런 시라면 얼마든지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