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챙기며 - 강인한
나이 오십이면
그래도 많이 살아온 셈일까
새삼스레 이삿짐을 챙기며
버릴 것 버리지 않을 것을
가름하기가 어려워진다.
붙박이로 그럭저럭 살다보니
뿌리가 깊어져서
쉽사리 허릴 펴고 일어서기 힘든
세월이었고, 어리석음이었다.
이제 머잖아
내 가진 눈물도 살도 다 버리고
붉은 노을 아래 홀로 떠나야 할
그런 날이 남아 있음에랴.
묵은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죽은 친구의 편지가
이 봄에 낙엽보다 쓸쓸하고
새로이 찾아가야 할 낯선 주소는
밤길인 양 서먹하다.
*시집, 황홀한 물살, 창작과비평
푸른 하늘 어디쯤 - 강인한
위대한 것들은 일찍이
시거나 떫은 것들이었다.
새벽부터 흰 망사를 짜던 안개의 딸들은
立冬날 아침 삼각산 일대에서
가뭇없이 떠나가고 없었다.
보란 듯이 질러가고 질러오는
아침 출근 승용차의 물결,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강 건너 불을 보듯 무심히 본다.
그런 내 몰골을
세상 풍경은 유심히 들여다보는 겐지
하루아침에
은행잎을 노오랗게 물들인 햇살이
이 좋은 날씨를 어쩔 것이냐고
벽창호들을 만나러 가는
내 얼굴을 간질거린다.
시지도 않고 떫지도 않은 쉰 고개의
태평스런 아침.
올해의 마지막 가을비와,
가진 것 없으므로 부끄러움만 넉넉한 겨울은
푸른 하늘 어디쯤 숨어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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