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 김점용

마루안 2013. 8. 17. 22:51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 김점용


죽은 아버지를 꺼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어떤 중년 사내가 끼어들어 같이 찍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폼만 잡았다

아버지와 나는 꼭 쉰 살 차이라
중간을 채우는 게 더 자연스럽지만
부재중인 사진사를 대신하여 타이머에 맞춰 찰칵 눌러도
중년의 사내는 찍히지 않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어두컴컴한 무덤을 배경으로
어깨에 손도 얹고 치즈 흉내도 내면서
필름 한 롤을 다 쓸 때까지 이래저래 포즈를 취했는데
이번에도 중년은 한 컷도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여서
중년의 사내가 사진관 주인인지 배다른 형인지
잘못 꺼낸 젊은 시절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어

언제 나갔는지 그가 사라진 뒤에도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빛바랜 생전의 영정을 바꾸려들 뿐
촛불을 들고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누가 아버지를 좀 말려주면 좋겠는데
아버지는 힘이 장사라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시집,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

 

 




무엇을 훔쳤는지 - 김점용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그러나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그것뿐
그는 없고 안방엔 낯선 사내만 둘
사지를 벌린 채 퍼질러 자고
예전에 어디서 본 듯한 붉은 이불귀를 가만히 만지다가
들고 간 빈 상자를
유골함 같은 단정한 빈 상자를 그대로 안고
조심조심 방문을 밀고 나오려는 찰나
잠자던 사내 하나 깨어나 내 상자를 손가락질하며 보자고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빈 상자일 뿐이라고 내가 거듭 말해도
아니라고 자꾸만 보자고 속내를 꺼내 보이라고 꼭 봐야만겠다고
그 통에 다른 사내도 일어나 도둑놈처럼 무서운 얼굴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지만
보여주면 안 되는 빈 상자를
내가 아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지
오직 그것뿐인데
빈 상자여서 몰래 나오려고 했을 뿐인데
주인을 담았는지
도둑을 담았는지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고
내가 주인인지 도둑인지 사내들인지
그것마저 사라져버리고
그들은 그들대로 무언가를 뺏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또 용을 쓰고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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