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귀갓길 - 원무현

마루안 2013. 8. 16. 18:19



귀갓길 - 원무현



오늘은 혼자서 막창집이다
벼랑 끝에 서 있어도 웃을 수 있게 했던 것은 무엇이냐
다들 근무 중인 낮부터 비우던 잔술로는 해답이 멀어
병째 들이키다 보는 낡은 액자 속 문구
'희망의 싹은 절망의 땅에서 돋는다'
앞날이 아뜩할 때마다 삼키던 저 독한 의지
언제부터 유효기간이 지난 각성제가 됐는지
골백번을 씹고 되새김해도 약발이 듣질 않는다
쪼개진 밥그릇을 든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외상장부에 모자란 술값이나 기록하고 도망치듯 길을 나설 뿐
밖에는 지금 비바람 치고 있다
타인의 하루 같기만 한 오늘과 기약 없는 내일 사이에 내리는
자정의 빗줄기가 목덜미를 그어댄다
늘 희망 쪽으로 뽑고 있었으나
이 순간 바람 앞의 촛불로 간당거리는 목
움츠리고 또 움츠리며 옷깃을 세운다
아얏 소리 한마디 못하고 감원 칼날에 맥없이 맡겼으니
내 스스로도 쳐버리고 싶은 것인데
무슨 하고픈 말이 남아 이리도 감싸고 있나
창자가 끊어지도록 토하면 넘어오는 것은 한마디 뿐


얘들아 아빠다



*시집, <사소한, 아주 사소한>, 지혜


 





홍어 좆 - 원무현



아시다시피 원무현씨는 남성이다
남성이면서 사내답지 못해 당하는 왕따 신세를 벗어나
심복들 줄줄이 거느리고 세상을 호령하는
진짜 사나이로 진화 중인 인간이다
더딘 진화에 채찍을 가하기 위해
원무현씨 흑산도에서 바다의 기를 들이키는데
어선에 실려 온 홍어들이
거친 파도를 제압하던 바다사나이들의 손을 빌려
그것을 떼어내고 있다
대접 못 받는 놈 대접 좀 받으려고
썩는 냄새 풀풀 풍기는 몸이지만
그 몸에 너도나도 코를 박고 냄새를 음미케 하는
아흐 코끝을 찡하게 하는 카리스마,
그거 한번 누려보려고
까짓 좆쯤이야! 마구마구 떼어내고 있다
저 겁나게 독한 결심,
온몸을 전율케 하는 아이러니,
눈물이 핑 도는 원무현씨
느닷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그것을 꺼내놓고는
사나이 진정한 상징은 무엇이냐
대낮부터 잠에 빠진 녀석을 마구 흔들어 깨우는데
화들짝 놀란 그것, 벌겋게 달아올라
어이, 홍어 좆이 그리 만만한 줄 아나!



*3인 시집, 삼색, 시와에세이






# 원무현 시인은 시를 참 잘 쓴다. 지방 잡대를 나왔든 삼류대는 커녕 야간상고를 나왔더라도 시인에게 학력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학력(學歷)이든 학력(學力)이든, 사람들이 목을 매는 학문의 힘은 변기에 앉았을 때만 필요할 뿐, 시인은 오직 시로 평가 받아야 한다. 잘난 평론가들이 말하는 문학성과는 별개로 약간의 속물 근성, 수컷의 능청스러움 등 이 시인의 시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시를 써온 경력이 꽤 되긴 하지만 그는 옛날에 썼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몽땅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 더욱 좋은 시를 쓰고 있다. 시인은 1963년 경북 성주 출생으로 이전의 시쓰기 활동을 버리고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재등단했다. 시집으로 <홍어>, <사소한, 아주 사소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