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혁명은 거기까지 - 박노해

마루안 2013. 3. 16. 08:18



혁명은 거기까지 - 박노해



레닌이 그랬다
막대기가 오른쪽으로 기울었으면
혁명은 반대쪽으로 확 기울여야 한다고


삶은 죽은 막대기가 아니다
사회는 죽은 말뚝이 아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나무이다


오른쪽으로 기울어 죽어가는 나무를
왼쪽으로 단숨에 잡아당겨 세우면
인간은, 사회는, 삶은 뿌리부터 죽어간다


혁명은 시멘트 바닥을 걷어내고
푸른 나무숲을 되살려 가는 것
한쪽으로 치우친 나무를 올바로 세워가며
자급자립하는 마을과 삶의 자율성이
뿌리 깊게 되살아나게 하는 것


혁명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성대로 돌려놓는 것이고
참모습을 되찾는 것이니


국가 권력의 지지대는
딱 거기까지이다
삶의 나무는 지지대가 적으면 적을수록
건강하고 푸르른 참사람의 숲이니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사로잡힌 영혼 - 박노해



나 어릴 적 아랫마을 용이 아제가
나뭇단 위에 꽂아온 진달래꽃을 건네주며
평아 빈산에 첫 꽃이 피었다야 참 곱지야
한 입 먹어봐라 속이 환하제


물동이를 이고 흰 서릿길을 걸어오던 점이 누나가
이마에 흐르는 물방울을 부드러운 손길로 뿌려내면서
평아 벌써 일어났냐아 샘물도 단풍이 들었다야
하도 가슴이 애려 퐁당 빠져들 뻔 했다야


아침 마당을 쓸기 싫다는 나를 마루에 앉혀두고
대빗자루 자국 선명하게 마당을 쓸고 난 어머니가
마당가 감나무 곁으로 걸어가 톡, 건드려
물든 감 잎사귀를 흙마당에 떨구고 나서 말없이
내 곁에 앉아 역광에 빛나는 붉은 잎을 바라보다가
평아 가을 아침이 참 고요하지야 미소 지을 때


바로 그때, 무언가 심오한 것이 내 마음속에서
전율하며 살아나는 경이로움에 그만 눈을 감았고
바로 그 순간,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득히
나를 데려가는 것을 떨림으로 지켜보았으니
나는 족쇄에 걸린 상상력도 미학도 인문학도 아닌
그냥 서럽고 환하고 가슴 시린 그 아름다움이란 것에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말았으니






#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시다. 사람이 착하다는 것도 시에서 온전히 감지할 수 있다. 온갖 고초를 겪었으면 사람이 독해지기도 하려만, 시인은 애초에 그런 유전자를 갖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왜 이런 시에 오래 눈길이 갈까. 이것도 천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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