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마루안 2013. 3. 15. 08:31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 - 심재휘



후회는 한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한평생은 그런 것이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문학세계사

 







고독한 배경 - 심재휘



남쪽에서 불던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어두워지면
더욱 선명해지는 꽃가지의
돌아선 어깨가 잠시 흔들리더니
우리 깊었던 시절의 그 꽃잎이 집니다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외로움을 지나치며 나는
꽃들의 향기와 그대의 발소리와
가지 끝에 걸린 나의
바람부는 밤들만 생각했습니다
꽃 진 가지 너머
창백하게 넓어진 하늘이
아무도 모르는 그 여윈 손으로
가지를 어둡도록 매만지는 걸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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