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교 - 전윤호

마루안 2013. 3. 9. 07:15



교 - 전윤호



이제 내가 죽을 만큼 외롭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그대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짐을 챙긴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잠겼다
더 이상 좁은 내 속을 들키지 않을 것이다
한잔 해야지
나처럼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들과
정치를 말하고 역사를 말하고 비난하면서
점점 길어지는 밤을 보내야지
한 재산 만들 능력은 없어도
식구들 밥은 굶지 않으니
뒤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고
변변치 않은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남들 앞에서 울지만 않는다면
나이 값하면서 늙어간다 칭찬 받고
단 둘이 만나자는 사람은 없어도
따돌림 당하는 일도 없겠지
뭘 더 바래
그저 가끔 울적해지고
먼 산 보면서 혼잣말이나 할 테지
이제 내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시집, 연애소설, 도서출판 다시


 






도원(桃園) 일기 - 전윤호



휴가 가는 친구를 내 고향으로 보내고
장대비 내려 종일 근심한다
갈아타는 기차를 놓치고
맨머리로 비 맞고 서 있는 건 아닌지
차편이 없으면 가스 충전하러 오는 택시를 잡으면 되는데
종일 비 내리고
강을 건너야 하는 민박집도 걱정이다
온순한 강도 바위에 거세게 부딪치면
코피 흘리며 흥분하는 법
술김에 잘못 나돌다가
산속에 며칠 갇힐 수도 있다
그곳에선 돌아가야 할 날짜가
아무 소용도 없이 연기된다
천둥번개가 치고
나는 깨닫는다
그곳은 내게나 편한 곳이라는 걸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은
도원은 그래서 도원이라는 걸






# 전윤호 시인은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