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 - 정철훈

마루안 2013. 2. 27. 05:39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 - 정철훈

 


새벽이 차다
내가 자고 나온 방을 질질 끌고 나온 것 같은
새벽이다
동아줄을 어깨에 감고 무언가를 끌고 있는 느낌
일리야 레삔의 그림에서 배를 끄는 노예들 가운데
내가 끼어 있는 것 같다


실은 아무 것도 끌지 않는데
내 쪽으로 끌어당겨지는 무언가가 있다
내 쪽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인간의 이기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끌어당긴다는 것은 내 쪽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포옹
내 쪽으로 흡착하는 입맞춤
내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사랑한다는 말


말이 당겨진다는 것
당겨져 어깨에 얹힌다는 것
평생 노예가 되어 끌어당겨도 좋을 사랑한다는 말
동아줄이 자꾸만 짧아지고 있다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창비

 

 




 


전철에서 졸다 - 정철훈



몇 정거장을 지나친 것을 뒤늦게 알고
화들짝 일어섰다 멋쩍게 주저앉는다
늦은 장마철이어서 그나마 빈 자리가 있었던 것인데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고
내 모르는 새 지나친 정거장 만큼
생을 훌쩍 건너뛸 수는 없을까
내릴 곳을 잊은 채 두 눈을 멀뚱거리는
낯선 얼굴이 차창에 어룽댔다
실은 내릴 곳을 영영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정거장 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자각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스쳐 지나간 정거장으로 돌아가야 할지
그대로 태연히 앉아 있어야 할지
다음 행선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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