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벽의 낙관 - 김장호

마루안 2013. 2. 24. 06:51



새벽의 낙관 - 김장호


 

밤샘 야근을 끝내고 난곡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낙엽을 털어내며 새벽바람이 일어나고
버스는 봉천고개를 넘어온다
신문배달 나간 둘째는 옷을 든든히 입었는지....
텅 빈 버스 창가에 부르르 몸을 떨며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방금 누가 앉았다 내렸을까, 연탄 크기만한
자국이 살아 있다
아직 온기가 미소처럼 남아 있다
누구일까, 이 차가운 의자를 데운 이는
크기로 보아 술집 여인의 엉덩인가
노름판에 개평도 얻지 못한 사내의 엉덩인가
아니다, 새벽장 가는 아지매의 엉덩일 게다
새벽 공사판 나가는 인부의 엉덩일 게다
세상살이에 흔들리며 데웠으리라
삶이란 세상에 따스한 흔적 남기는 것
나 역시 그대에게 줄 미소 하나 만든다
새벽에 찍는 하루의 낙관



*김장호 시집, 나는 을이다, 한국문연

 






 

나는 乙이다 - 김장호


 
나는 乙이다, 항상 부탁하며 살아가는
원래 낯가림이 심해
낯선 사람과 잘 사귀지 못했지만 그나마
조금씩 염치없어져 乙로 살아가지
당신은 넘볼 수 없는 성채의 성주
당신 앞에 서면 한없이 낮아진다네
나를 사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당신 눈도장 찍느라 하루해가 모자라네
당신은 甲 노릇만 하고, 난 乙 역할만 하는지.....
아비처럼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네, 세상엔
乙의 인생도 필요하다고 마음 고쳐먹었네
눈여겨보는 이 없는 풀처럼
뜨거운 적의를 내려놓았고
이제는 새우등이 몸에 배었지만
나를 선택해줄 땐 고마워 눈물이 난다네
어둠의 갈피에 눈물자국 숨기고 돌아가지만, 가끔
아내의 손때 묻은 잔소리도 묵묵히 들어주네
그래도 한밤에 목말라 자리끼를 찾다가
내 영혼의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본다네






# 누가 그랬던가. 눈물 묻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딱 그 말에 적용이 되는 시다. 새벽 버스를 타본 사람만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다. 김장호 시인은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사람으로 노동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집의 첫 장과 둘째 장에 실린 두 시가 시인의 세상 보는 눈을 말해준다. 간만에 제대로 가슴에 와닿는 시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