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마루안 2013. 2. 6. 05:24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시집,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








은행에서 - 천양희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전에 나는
지불할 약속이라도 후회라도 있는 것처럼
몇초만 더 머물러야 한다
문밖에는 종일 빗소리 부풀고
접었다 폈다 마음은 우산처럼 젖는다
명치 끝에 걸린 그리운 것들을
쓸어내리며 나는
못다 한 말들과
공복의 시간을 청구서에 적는다
생활이란 무엇이냐, 사람이란 또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하며
生을 당겼다 밀어본다, 문도 한번
열었다 닫는다
내가 생의 속으로 들어가
생 속을 들춰본다
떨어질 듯 매달린 벼랑이 몇
날 밝기 기다린 어둠이 몇
나는 아직도 밀지 못한 절망이 많다고 믿는다
아, 한때의 꿈들
온라인으로 이어지고
잠시 나는, 만기로 저축해둔
꿈 하나를 통장에서 꺼낸다, 새의
알을 꺼내듯이 조심스럽게
세월이 한 계좌를 짊어지고 휘청거린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믿고
희망에 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