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 든 무, 내 마음에게 - 이창숙

마루안 2013. 2. 3. 04:58

 

 

바람 든 무, 내 마음에게 - 이창숙


 
가만히 이삿짐을 꾸린다
빈 차, 어디서 불러올까
내가 전화하면 골목, 여기 내가 사는 곳으로
달려와 줄까
그 사람은 지금 기쁨일까 슬픔일까
그냥 달려와 나의 주소 앞에서 기다리겠지
기다리다가 기쁨도 슬픔도 없이 무덤덤하게
내 무거운 마음 보따리를 바쁘게 싣기만 하겠지
나는 쳐다만 보고 있겠지
나는 그가 실은 짐 하나씩을 도로
내 주소 앞에 얼른 내려놓겠지
그는 화를 내겠지
그럼 나는 울고 서 있겠지
어디 후미진 곳에, 이십 수년을 붙잡고 있던
형체도 없는 그 무엇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며
미안한 마음 가득 얹어 제발 떠나 달라고 나는
그 앞에서 무릎 꿇겠지
그는 '왜 사느냐'고 비웃으며 인사도 없이
큰길로 차를 몰겠지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바람 든 무 같은 내 마음에게
지나온 내 삶 되짚어가다가
제발 먼지가 되어 흩어지길 기도하겠지


나도 이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봄 - 이창숙

 

 

나 이제 보라빛 나이
세상은 연둣빛 빗물 머금는구나
드문드문 봄볕 강둑길 적셔 오고
낯선 길 낯설지 않게
마을 한쪽 절룩이지 않게
하늘 포개 안은 구름 속으로
키 작은 소녀 제비꽃과 함께
파랗게 새살 돋우며
두려움에 아프지 않기
등 떠밀리지 않기


내딛는 발걸음 사이로 꼼지락거리며
보랏빛 아지랑이로 피어나는 시절

 

 

 


# 이창숙 시인은 1951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1994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 안에 길을 내어>, <아무도 없다>,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