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발한 인생 - 정병근

마루안 2013. 1. 29. 06:50



기발한 인생 - 정병근
 


명절도 아닌데 막히는 길 어찌 알고
차들 새를 비집고 다니며 뻥튀기나 오징어를 팔고 다니는
저 남자의 인생을 나는 알고 있다
불과 5분 사이에 그는 나타났다
어디에서 왔다기보다 그냥 불쑥 출몰했다
그는 한때, 시덥잖은 마술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회충약을 팔았거나 살모사의 꼬리를 슬슬 당기며
정력제를 팔았거나 이상한 씨앗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물을 펄펄 끓였으며 관광버스에 올라와
당첨된 금시계를 나눠주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내게 불쑥,
밍크 코트를 내밀지는 않았던가
맑은 날에는 장작불에 닭을 구웠고
비가 오면 어느새 그는 우산 장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의 호주머니를 후려내던 야바위꾼이었으며
비장의 한 수를 유혹하던 박포장기였다가
최근엔 도청 장치 사기 도박으로 쇠고랑을 찬 적도 있다
그에게 나 같은 인생은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그는 요리조리 잘도 피하고 도망다니면서
언젠가는 보란 듯이 한밑천 잡고 말 것이다
비장의 무기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는 언제든 출몰할 태세가 완비되어 있다

 


*시집,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

 







머나먼 옛집 - 정병근



땡볕 속을 천 리쯤 걸어가면
돋보기 초점 같은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백 년쯤 걸어가야 당도하는 집
붉은 부적이 문설주에 붙어 있는 집
남자들이 우물가에서 낫을 벼리고
여자들이 불을 때고 밥을 짓는 동안
살구나무 밑 평상엔 햇빛의 송사리떼
뒷간 똥통 속으로 감꽃이 툭툭 떨어졌다
바지랑대 높이 흰 빨래들 펄럭이고
담 밑에 채송화 맨드라미 함부로 자라
골목길 들어서면 쉽사리 허기가 찾아오는 집
젊은 삼촌들이 병풍처럼 둘러앉아 식사하는 집
지금부터 가면 백 년도 더 걸리는 집
내 걸음으로는 다시 못 가는,
갈 수 없는, 가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