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을 견디는 법 - 고재종
오무라졌던 분꽃이 다시 열릴 때
저 툇마루 끝에
식은 밥 한 덩이 앞에 놓고 앉아
혼자서 멀거니
식은 서천을 바라보는 노인이여!
당신, 어느 초여름날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것도 모르고
옆 논의 아제가 힐끔대는 것도 모르고
그 푸른 논두렁에서
그 초롱초롱한 아이에게
퉁퉁 불은 젖퉁이를 꺼내 물리는 걸
난 본 적이 있지요
당신, 그 薄暮(박모) 속의 글썽거림에
나는 괜히 사무치어서
이렇게 추억 하나 꺼내봅니다
생은 추억으로 살 때도 있을 법해서
그만 죄로 갈 생각 한 번 해본 거지요.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문학동네
길에 관한 생각 - 고재종
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
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 밭에 서면
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
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
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
하루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
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
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버린
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
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
살다보면 정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채이든
가다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
먼 산을 가늠해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니,
욕망의 초록이 쭉쑥 뻗쳐오르던 억새풀 언덕에
마른 뼈들 스치는 소리는 생생하다. 그 소리에
삶의 나날의 몸살에 다름 아니던 별들은
또 소스라치다 잦아드는 새벽, 오늘도
푸성귀 밭에 나가 오줌발을 세우는 것은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갑오패 같은 그리움
이토록 질기다는 것인지. 어디서 종은 또 울고,
그러면 황급히 말발굽을 갈아끼우고
잡목에 덮인 저 황토잿길을 올려다보는
마부처럼, 꿈에 견마 잡힌 우리도 뚜벅뚜벅
발길을 떼야 하는 일이 새삼 절실한데
소슬바람은 부는 것이다. 계절은 벌써 깊어져
우리는 또 한 발 늦는다 싶은 것이다.
한 발 늦는 그것이 다시 길을 걷게 한다면
저 산도 애써 아침해를 밀어 올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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