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연에 가까운 사랑을 미루면 어떤가 - 황학주

마루안 2013. 1. 29. 06:29



우연에 가까운 사랑을 미루면 어떤가 - 황학주

 
 
한쪽으로 도는 물 속에 뽀얀 잎사귀 하나만

잠겨 있는 저녁 하늘


아주 아주 얇은 파문이 하나 저렇게 우연이라는 테를 두르고 가듯이
사랑은 사랑에게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옮기는 중
사랑에 대해서는 다 몰라야 한다는 걸 알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몇 시인가 묻는다
나 죽어서 화장해도 돼? 라고 당신은 묻는다


우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헙수룩한 뗏목여행이라 해도
어디선가 서로의 우연이 되어준 지상의 강물 같은 사랑을 추억할 수 있다면


우연이 내편이라고 할 수 있도록 오래 사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새치기 할 수는 있지만 줄을 안 설 도리는 없는
어떤 필연에 대해 당신이 읽어 준다
비칠 듯 말 듯한 필연이 얇은 저녁강 물소리로 들린다



*시집, 노랑꼬리 연, 서정시학

 
 






아홉 번째 가출 - 황학주



세 시간쯤 비 내리는 거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듣고 있는지 그 얼굴은 가만히 기울어 있었다
유품 가방을 싸는 나는 살아 있는 것을 잡아넣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금붙이 낀 손가락 하나를 어딘가 놓고 와
뭉그적거리는 듯
영정 속의 얼굴은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가 집 나간 것을 알겠다, 바람 이는 대숲 사이로
절름절름 지나는
세상이 원하지 않는 자의 발소리 같은 잠꼬대가 있었다
그렇게 가다만 슬픔은
사람들이 돌아간 뒤 스스로를 목련나무 아래 고봉으로 덮어 놓을 것이었다


댓잎을 날리듯 어딘선가 이사한 집주소로
어느 날 제 소지품을 부쳐오던
그대 끊기지도 펴지지도 않는 혈연의 구루
이제 낙상으로 떨어진 곳은
아홉 번의 가출 중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그는
네 시간쯤 비 내리는 거리에 가 묻히었다






# 예전에 황학주 시집을 들추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흑백 사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한때는 하루 두 갑을 피울 만큼 지독한 애연가였기에 그 사진을 볼 때면 어디선가 구수한(?) 담배 냄새가 풍겨 올 듯했다. 손가락을 자르는 심정으로 어렵게 끊은 담배와의 결별 10 여년,, 담배 맛은 잊었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아련한 쓸쓸함으로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