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行(중년행) - 강인한
만 서른 다섯 살의 한여름에
나는 射線(사선)을 떠난다.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마지막으로
빈총을 쏘아 보고
빈총에 맞아 비틀거리는 내 청춘을 돌아본다.
내 손에 묻은 화약 냄새가 엷어지며
질긴 명령 복종의 능선도 끝나고
슬그머니 귀순하는 저녁놀을 본다.
나는 이제 떠날 수 있다.
철없는 양심과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떠날 수 있다.
예비군에서 민방위대로
제복에서 제복으로 건너가는 한여름의 나무 끝에
청청한 바람은 불어 가는데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말자
소금 기둥으로 서 있는 내 젊은 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나는 떠날 수 있다.
헛된 구호를 비웃으며
조작된 공포를 비웃으며
마음에 안 드는 땀방울을 비웃으며
나는 두 손으로 彈皮(탄피)를 반납하는 가난한 국민,
정직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 손으로
내 젊음의 불가해한 用役(용역)을 되돌려주고
閉經期(폐경기)로 가는 여자처럼
나는 이제 射線(사선)을 떠난다.
*강인한 시집, 전라도 시인, 태멘기획
고백 - 강인한
질척이는 소문을 밟지 않고
건너뛰는 법을 배웁니다.
불편한 항쇄 족쇄를 절컥대며
납짝하게 잠드는 법을 배웁니다.
발에 맞지 않은 구두가
아주아주 편안해질 때까지
오래 참겠습니다.
고린도전서 십삼장처럼,
깨끗한 한 발만 치켜들어
치사스런 양심일랑 미련없이 배설하며
보여 주시는 것만을
보겠습니다.
당신이 바라신다면야 이 천한 몸
갈기갈기 찢어
한 사발의 진한 정력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납짝납짝 걷는 법을 배웁니다.
납짝납짝 사는 법을 배웁니다.
# 30년 동안 시집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이 나온 것도 1982년이니 까마득한 세월이다. 이 시가 실린 시집에 따르면 시 <중년행>은 (목요시 1979년 가을호)에 <고백>은 (한국문학 1979년 12월호)에 실렸다. 그때 시가 뭔지도 잘 몰랐던 내가 어떻게 이 시집을 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983년에서 85년 사이일 거다. 아마도 다른 책을 살 때 덤으로 산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출판사 태멘기획은 연극도서를 많이 출판했었고 나는 그때 연극을 자주 보러 다녔다. 기껏 해야 윤동주와 한용운, 김소월의 시집을 본 게 전부였기에 당시 이 시집을 읽고 크게 감명 받은 기억은 없다. 시집 앞장에 실린 김현승 시비 앞에서 찍은 강인한 시인의 흑백사진이 시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가기 싫었던 예비군 훈련도 마쳤고 늘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민방위 훈련도 끝났다. 뒤늦게 이 시집을 읽었다. 청년 시절 샀던 책을 중년에 들어 읽은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두 편을 골랐다. 시인은 일찍 성숙해서인지 서른 다섯에 중년행을 말했다. 나는 마흔에도 중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흔 다섯을 넘기고야 중년을 수긍했다. 아직 노안이 오지 않아 다행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넓은 등이 있어 - 이병률 (0) | 2013.01.29 |
---|---|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 서상만 (0) | 2013.01.29 |
똥패 - 박이화 (0) | 2013.01.26 |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정호승 (0) | 2013.01.20 |
바람의 말 - 마종기 (0) | 2013.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