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 시편 - 고운기

마루안 2013. 1. 12. 05:35



가을 시편 - 고운기



가슴에 남아 미처 하지 못한 말 있거든
이제 다음 계절로 넘기자
지금은 한 해를 갈무리 하기에
해는 저렇게 빨리 져 갈길을 재촉하지 않니
찬란했던 봄날과 뜨거운 여름을 밟고 온
우리들 생채기가 더러는 아물었으니
되새겨 깊이 삶의 의미도 다져야지
행여 사람답지 못하게 굴었던 못난 일 있거든
그것도 웃으며 기억 속의 한 켠에 접어두자
해 저문 들판에 서성이기보다
우리들 삶의 연장을 챙겨들고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살아 숨쉬는 마을로 가
흙 묻은 옷을 벗어 털고 쉴 자리를 청하자
그래서 가을 해는 저리 짧아만 가고
노을은 저토록 붉게만 타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 이른 곳 어디라도 그 자리에 행장을 풀어
긴 밤도 그냥 잠으로만 보내지 말고
다시 올 봄을 기다리기로 하자
아, 이 가을에도 어디로 떠나야 하는 사람아
기어이 오래도록 지우지 못할 뒷모습만
왜 그립게 하는가.



*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청하

 
 






무화과 - 고운기



무화과 나무 아래로 다시 가 볼까요
꽃이 없어서 아니겠지만
터질 듯 빨갛게 익으면
한 웅큼 작은 손에 열매를 쥐고서
그대에게 전하고 싶어 가슴 설레던
그런 시절 있었지요
언제나 지나간 세월 돌이키기란
부질없이 쑥스러운 일
다시 그대를 그리워하지는 않겠지만
꽃이 피지 않아서 아니겠지만
무화과 나무 아래
내 희고 좁은 얼굴을 묻고
차라리 조금 덜 익은 열매처럼 독하게
살고 싶군요
짐짓 모른 척 지나치면서
아쉬워하지 않고 의연한 척
살아야 하나 봐요, 무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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