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간신히 봄은 온다 - 이기와

마루안 2013. 1. 15. 07:25



간신히 봄은 온다 - 이기와
―영자야 4 



봄으로 가는 대로(大路)가 붐벼
영등포 샛길로 접어들다 우연히 보았다
한파의 고비 지나 다시 마주친,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은
과거에 물린 너, 아니 나
텍사스촌 어딘가에서 도매금으로 넘어온
피기도 전에 말라버린 쬐그만 꽃송이들
유리벽 안에 줄줄이 꽃꽂이 되어 있다
선지빛 붉은 조명등 아래 서면
더욱 물 좋아 보이는 너의 여색
화장한 두께만큼 덧나고 짓무른 너의 치부가
흐린 밤마다 불구의 이방인들에게 수청 들어
온전한 자식을 낳기도 한다지
쇳바람이 훑고 간 헤쳐진 가슴으로
풀과 나무 닮은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고
한 집안을 산천초목으로 살찌우기도 한다지
그 곰탕처럼 끓고 끓은 너의 눈물이
지아비를 위해 따순 새벽밥을 짓기도 한다지
칠흑의 사육장 이지러진 너의 몸뚱이에도
간신히, 봄은 온다지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 서정시학

 






 
시간의 뼈 - 이기와


 
하루살이가 하루를 산다고
어느 딱딱한 두뇌가 말하는가
인간이 창조한 하루와 하루살이가 창조한 하루는
같은 열매이지만 그 맛과 향이 다르다
인간이 죽지 못해 섭취하는 건
한 백년의 기름진 나이지만
하루살이가 먹는 건 허공의 넓이와
저녁노을의 깊이다
인간보다 더 그윽이 세월을 먹은
하루살이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와
때 묻은 발을 씻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복병과 우울증과 과대망상으로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간들이 사라져 갔다
그러고 보니 저녁이 올 때까지 춤추는 나는
과분하게도 오래 살았다


여름밤의 강변공원 은빛 비늘 번뜩이는 야외등 밑에서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들어가는 부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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