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드라이아이스 - 김경주

마루안 2013. 1. 10. 06:33



드라이아이스 - 김경주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고대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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