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 허연

마루안 2013. 1. 5. 07:33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 허연

 

 

굳은 채 남겨는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 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슬픈 빙하 시대 2 - 허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나는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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