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화양연화(花樣年華) - 이병률

마루안 2013. 1. 5. 07:11



화양연화(花樣年華) - 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두운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생의 딴전 - 이병률



제삿날도 아닌데 양초를 사러 나갔다가
빌 것도 없는 두 손으로 양초 한 갑을 받아들고
남은 마음으로 과자 부스러기를 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글 한 줄 읽지 않은 듯해
성큼성큼 동네 한바퀴를 도는데
사람들 추운 이마에 얼기설기 내려앉은 불빛들
그 불빛들이 따스해 보여 손 뻗었더니
흠칫 놀란 사람들이 등 돌릴 채비를 한다
혼자 살다보면 머릿속 불은 환히 밝힐지라도
마음 불은 내비치면 탈이 되는 법


며칠 전 해질녘에도
횡단보도에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 마주친
한 여인 입가의 점 하나
점이 밀어올린 도톰한 풍경
내가 반가워한 건 풍경 그늘인데
화들짝 짜증을 내며 뒷전으로 물러서는 여인
이쯤에서 그을음은 마음 안으로 밀려들어 오고
닫아걸어야 할 창문 안쪽에는 서름한 빛 몇 줄기만 겸연하다


혼자 사는데 초라도 켜놓으라고
누군가 말해줄 것만 같다
혼자 사는데 더 어둑해지라고
누군가 골목을 지나면서 손 흔들어줄 것만 같다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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