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마루안 2012. 12. 31. 21:5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 편지 10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

 







오늘 같은 날 - 고정희

- 편지 7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 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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