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는 기울고 - 김규동

마루안 2012. 12. 31. 21:12



해는 기울고 - 김규동

 
 

운명


기쁨도
슬픔도
가거라


폭풍이 몰아친다
오,폭풍이 몰아친다
이 넋의 고요


인연


사랑이 식기 전에
가야하는 것을


낙엽 지면
찬서리 내리는 것을

 
 
당부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보이리
길이



*시집, 느릅나무에게, 창작과비평


 






송년(送年) - 김규동

 


기러기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김규동 시선집, 길은 멀어도, 미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