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혼의 순도(純度) - 정일근

마루안 2012. 12. 31. 21:20



영혼의 순도(純度) - 정일근

 


오래 살았다는 개의 눈을 들여다보다
오금 저린다. 어느 생이었거나 이번 생에서
한 번은 마주쳤던 저 눈빛 나를 본다
개의 눈빛 속에 숨어 있는 인연의 눈빛이 읽힌다


우리는 분명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내가 입고 사는 사람의 가죽이나
개가 덮어 쓰고 사는 털가죽은
영혼을 담는 옷일 뿐, 우리는 처음
같은 옷을 입었던 선한 영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따라 영혼의 옷이 달라졌을 것이다


개의 옷을 입은 애절한 눈빛 앞에서
나는 아뜩해진다. 저 개는 나를 알고 있다
사람 가죽 속에 숨어 있는 내 영혼 환희 쳐다보고 있다


개여, 너의 눈으로 보는 내 영혼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가
나무였던가, 풀꽃이었던가, 바람이었던가
제 이름 한번 불러주길 원하는 개의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 다시 아뜩해진다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흔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