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마루안 2012. 12. 31. 20:37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 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여림 시집, 새들이 안개 속으로 걸어 간다, 작가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를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 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 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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